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선포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선포

설교는정보화 시대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디에서 같은 사람이 같은 사람들에게, 때로는 수년간, 매주에 걸쳐 30 정도를 말하는 경우가 있을까? 설교의 이러한 독특함에 대해 생각해 있는가? 나는 이와 비슷한 것을 생각해 없다.

이렇게 만연한 것인데설교는 조금 구식이지 않은가? 텍스트, 트위트, 인스타 릴 영상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설교는 마치 다이알식 전화기처럼 구식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수천 개의 교회에서는 이 일이 계속 반복적으로 실행되어지고 있다.

이에 더하여, 설교의 주장은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은가? 야외 물놀이 공원 같은 곳에서 있는 편안한 대화중에 설교에 대해 언급해보라, “있잖아나는 일주일에 번씩 이런 곳에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 말해 주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그럼 사람들은 눈썹을 치켜올릴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 교회에서 음악이 가장 뜨거운 토픽임에도 불구하고, 톰 레이너Thom Rainer 여전히 좋은 설교가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첫번째 이유로 남아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1]

이 모든 것을 고려할 , 설교는 정말 독특하다. 바울이 1세기의 고린도 사람들에게 설교를 "어리석음"이라고 묘사했을 이러한 점을 감지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철학자, 교사, 유대인, 이방인이 고린도에 가득했다. 전통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적을 갈망했고, 그리스-로마 문화는 이성과 웅변에 집착했다. (고린도전서 1:18-2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청중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구세주가 자신이 십자가에 박히도록 허락하며, 그의 죽음이 인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할까? 이 변두리 출신 교사의 의심스러운 가정 배경 그가 함께한 농민들, 사회 부적응자들고려할 그의 메시지를 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갈릴리 사람, 예수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무슨 소리야 바울, 정신이 나갔구만!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말도 된다고 여긴 것을 하나님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어리석은" 복음은 바로 "어리석은" 소통 방식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전달 매체인 설교와 메시지의 내용인 복음은 이런 점에서 일치했다.

바울이 먼저 이러한 설교의 독특함을 인식했다면, 1500년이 더 지난 후에 요한 웨슬레는 그것에 새로운 빛을 비추었다. 설교 16, 은총의 수단 (1746)에서, 웨슬레 설교의아름다운 독특성에 대해 은총의 수단이라고 표현했다.

"은총의 수단"이라는 문구에 대해 당신이 궁금해 한다면, 웨슬레 그의 어머니 무릎에서 매일 일과 Daily Office’의 기도를 드리던 그의 청교도적 뿌리에서 이 문구를 받았다.[2] 웨슬레 따르면, 주요 은혜의 수단은 다음과 같다:

...홀로 드리는 기도 또는회중과 함께하는 기도; 성경을 탐구하는 (이는 읽기, 듣기, 묵상을 포함함) 그리고 주의 만찬을 받는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의 영혼에 전달하는 일반적인 수단 ordinary channels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3]

웨슬레 18세기식 문장이 혼란을 준다면, 그가 의미한 바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평범하지만 심오한 방식으로 은혜를 부어주시기로 선택하셨다. 웨슬레 바울의 말을 반향했다. 고린도사람들이 복음과 선포를 너무 평범하게 여겼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 어리석음이라고 불렀다. 웨슬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 하나님은 설교의 평범한 수단을 사용하여 그의 사랑에 대한 인식과 그를 따르라는 부름 가운데 우리의 감각을 넘치게 하신다고 가르치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웨슬레 바울처럼 평범함을 옹호했다. 왜냐하면 평범한 것을 통해 하나님은 종종 비범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설교는 은총의 수단이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설교자가 같은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 하나님의 영감받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성령에 맞추어진 초점이 없다면, 설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은 단순한 의식이나 죽은 행위가 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연구를 통해 자라며, 기도를 통해 경작되며, 신실한 선포로 목소리를 내고, 성령에 의해 열린 귀로 받아들여질 , 하나님의 은혜는 비처럼 내려오고 새로운 생명은 탄생하여 자라난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 경험한 것은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였다. 아마도 그것은 교회 캠프나 부흥회였을 것이고, 그곳에서 설교자가 설교했고, 복음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마음을 꿰뚫었다. 우리는 설교에 응답했고 우리의 삶의 궤도가 바뀌었다.

설교에는 아름답고 독특한 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선행, 칭의, 성결의 은총을 부어주는 평범하지만 신성한 채널이다. 이번 주에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 성령님께 당신의 귀를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위해 설교의 어리석음에 힘을 실어달라고 요청하라.

샘 바버Sam Barber 남중부 오하이오 연회의 감독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2024 8 1일부터 나사렛 제자훈련국(NDI) 글로벌 디렉터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1]. Thom Rainer, “Seven Reasons People Choose a Church,”                  https://churchanswers.com/blog/seven-key-reasons-people-choose-church/. 2024. 3. 31 열람. 레이너의 연구는 83% 사람들이 설교의 질에 따라 교회를 선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수잔나 웨슬리는 자녀 명과 따로 약속 시간을 정하고거룩한 삶의 기술 훈련시켰다. “매일 일과Daily Office” 에는 “… 은총의 수단과 영광의 소망을 위해...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다음을 보라.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1), 596. Kindle. 

 

[3]  Albert C. Outler and Richard P. Heitzenrater, John Wesley’s Sermons: An Antholog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1),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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