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신부

우리는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구성된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믿는가?
분명히 우리의 신조에서 나사렛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공동체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말씀을 통해 성령에 의해 함께 불려진 그리스도의 몸으로 믿는다.[1]
그리고 이것은 모든 정통 기독교인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함께 지탱하는 니케아 신조에 정식화되어 있는 믿음을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우주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이며, 그것이 거룩하고, 우주적(가톨릭)이며, 사도들에 의해 세워져 있음을 고백한다. 교회는 물론 은혜로 인해 거룩하다. 그리고 가톨릭이라는 단어는 어느 한 교파(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중심 진리를 지니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모든 교파를 가리킨다.
그러나 교회는 정말 하나인가? 세계는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신부
우리가 이 일에 대해 잘 생각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한 가지 성경적 진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에 대한 신약의 그림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내의 위대한 장인 21장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거기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며,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된 것처럼 예비되어 있는” 것을 본다(2절).
그러나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이 새 예루살렘은 신부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그림의 언어이다. 새 예루살렘은 실제로 하나의 도시이다. 이제 이 역시 물론 그림의 언어이다! 우리가 좀 더 문자 그대로 말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도시를 말하는 이것 하나의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역시 흥미로운 단어이다. 그것은 친교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이에 대한 그리스어 단어(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수 있듯이)는 코이노니아 koinōnia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룹(koinos)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신약이 사용하는 또 다른 단어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2장 참조.)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에 대한 이 그림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 시대에 대한 비전
첫째, 이것은 마지막 때에 대한 환상이다. 우리는 이 시대가 끝날 때, 즉 요한계시록의 모든 전쟁과 투쟁이 끝나고 어린양이 승리를 거두었을 때, 바로 이 시대가 끝날 때, 바로 이 때에 이 비전을 갖는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보편적인 비전이다. 나는 “새 땅”이라는 이 표현을 좋아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된 땅 위에 굳게 발을 딛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는 엄청난 위안이 있다!
따라서 교회는 결국 “남편을 위해 단장하는 신부”로 나타날 것이다. 그때가 그리스도의 신부의 영광과 연합이 드러나게 될 때이다. 20세기에 있었던 여러 다른 교파들의 조직적 연합을 가져오기 위해 투자된 모든 시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종말론적 희망, 즉 마지막 때에 대한 희망일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조직적인 연합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끝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의 아름다움과 연합(그것은 항상 그곳에 있었던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신랑
그리스도의 신부에 대한 이 그림과 관련된 두 번째 요점은 그것이 우리에게 신랑인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요한이 신부에 대한 환상을 보기 훨씬 전에 예수는 자신을 신랑이라고 말했다. 세 공관 복음서 모두에서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금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마태복음 9:15; 마가 2:19; 누가복음 5:34).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신랑이 올 것을 기다리는 신부의 비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요한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에 기뻐하는 신랑의 친구라고 말한다(요한복음 3:29).
따라서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의 부산물이다. 교회는 그분의 교회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교회를 사랑한다. 우리는 그것의 심각한 흠들을 모르지 않는다. – 교회 권력자들은 20세기 동안 심각한 실수와 오류를 범했으며, 심지어 심각한 죄에 빠졌다. 우리는 교회 안에 심각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결을 사랑하는 우리 중의 최고들 조차 때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교회가 “점이나 주름”없이 드러나게 될 그날을 기다린다(에베소서 5:27).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인가?
마지막으로, 간단한 후기 생각. 교회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그 생각은 3세기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싸이프리안과 관련이 있는데, 그는 “누구도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둘 수 없다”고 선언했다. 싸이프리안의 말이 옳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교회”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이를 제도적으로 연합된 하나의 조직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인다면, 모든 개신교들은 그것과 달리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을 통해 사람이 교회의 친교에 참여하지 않은 고립된 외로운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이프리안의 말은 분명히 옳았다. 그리고 그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참된 친교가 있는 “그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바울의 선언에서 성경적인 증거를 얻는다(갈라디아서 3:26). 하나님의 의도에는 기독교인을 의도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대한 자리가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친교가 필요하다.
[1] Article XI, 나사렛 교리와 장정,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