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의 유산 홀리네스 투데이

디트리히 본회퍼의 유산 홀리네스 투데이

1906년, 포드 자동차 회사가 조립 라인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을 때,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손을 통해 무선 통신이 시작되고 있을 때, 라이트 형제가 동력으로 비행하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했을 때, 칼과 파울라 본회퍼는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그들의 여섯 번째 아이를 맞이했고, 그 아이에게 디트리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학자인 디이트리히의 아버지는 특별히 종교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인 칼 알프레드 폰 하이스의 집에서 자라났으며, 그녀는 남편에게 본회퍼 가족의 자녀들은 성경, 학습, 음악, 봉사에 대한 애정을 가진 깊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라게 하도록 남편을 설득했다. 초기에 디트리히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로 구별되었으며,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함께 유쾌한 매력을 발산하는 사람이었다.

디트리히의 이야기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귀족 사회에 있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과 유사할 수 있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신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 정권의 부상과 맞물려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본회퍼의 초기 연구는 교회와 제자훈련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의 박사 학위 연구는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를 통해 존재하심을 강조했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가 총독이 되었을 때, 본회퍼의 예리한 통찰력은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않은 지도자는 대중들에게 거짓 지도자와 우상이 될 수 있는 위험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가 “총통의 원칙”에 대해 경고한 본회퍼의 라디오 방송은 그가 발표를 끝내기도 전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1933년 4월에 그는 나치의 반유대인 정서에 대한 아주 초기의 개신교 비판 중 하나인 《The Church and the Jewish Question 교회와 유대인 질문》을 집필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나치의 주목으로부터 그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국가와 교회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에, 젊은 목회자 본회퍼는 '제국 교회 Reich Church' 가 노력하고 있던 총통과 그의 이데올로기 주변으로 독일 교회와 교인들을 연합시키려는 운동에 대해 심대한 우려를 갖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고백 교회'에 깊게 관여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본회퍼는 핀켄발데에 있는 지하 신학교를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로 신학적 준비를 실천하도록 돕게 되었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아무런 차이점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저 그 혜택만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값싼 은혜”라고 부르는 것), 하나님의 은혜는 감사와 함께 성경과 성령의 지시에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가장 유명한 두 저작인 핀켄발데 공동체 뒤에 있는 일상과 윤리를 상세히 설명한 《Life Together 함께 사는 삶》과 그의 최고 저작《The Cost of Discipleship 제자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두 책은 오늘날의 교회의 삶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에서 긴장이 계속 고조되는 가운데에, 본회퍼는 단순히 제 3제국에 대한 그의 반대를 설교로 표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나치 운동에 반대하는 책임있는 행동에 대해 고려하며 이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짧께 머문 시간 후, 그의 삶에 일어날 피할 수 없는 위험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디트리히는 독일로 돌아와 독일 국민들과 함께 저항의 시련을 함께 견디게 되었다.

최근의 영화 《본회퍼: 목사, 스파이, 암살자》에서 예술적 라이센스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된 것처럼, 본회퍼는 무장 정보 저항운동에 참여하면서 전 세계의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에게 소식과 설득을 제공하는 자가 되었으며 유대인 구출 노력에도 도움을 제공했다. 그가 히틀러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노력에 연관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암살 시도에 참여했었다는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그는 1943년 4월에 체포되었으며, 저항 운동에 참여한 증거들이 나오면서 집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을 때에도 다른 수감자들에게 봉사했으며, 허용될 때에는 수용소 내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했다. 1945년 4월 9일 독일의 항복을 불과 몇 주 앞두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플록센뷔르크 집단 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 끝이지만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다”이었다.

이 시점에서 일부 독자들은 웨슬리안-성결 출판에서 왜 독일 루터교 목사에게 주목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할 수도 있다. 대답은 간단하다. 본회퍼와 웨슬리는 서로 다른 신학적 전통에 있었지만, 그들은 은혜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믿음과 순종을 포함한다는 놀라운 신념을 공유했다. 본회퍼와 웨슬리가 성경의 예수님을 추구하며 보여주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놀라운 유사한 내용을 강조한 문장들을 주목해 보라.

은혜는 수동적이지 않다

본회퍼가 “값싼 은혜”를 좋아하지 않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상으로 제공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반응을 구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반응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인간과의 그 바른 관계를 값싸게 만든다. 본회퍼가 이 말을 했을 때 만일 웨슬리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는 “아멘!”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웨슬리는 기독교의 목표가 성결이라고 이해했다. 이 성결은 마음의 정결함을 통해 증거될 뿐 아니라 믿는 자들의 순종하는 행동,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표현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으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만 가능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제자도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제자도의 비용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본회퍼는 “오직 믿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으며,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고 썼다.[1] 제자도에 대한 유명한 저자이자 'The Bonhoeffer Project 본회퍼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빌 헐은 그의 저서 《회심과 훈련 Conversion and Disciplines》에서 본회퍼의 신념을 단순하게 잘 표현했다.[2] 일부 잘못 취급된 설교와 실천에서 보여진 반대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것과 그의 제자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지 않으셨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신학의 선구자 요한 웨슬리는 조직적으로 회심자들을 소사이어티, 구역, 밴드 등의 조직으로 모이게 하여 거룩한 마음과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하도록 했기에 본회퍼의 방식에 찬성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가서 모든 민족들에게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a)고 말씀하셨다.

공동체는 필수적이다.

본회퍼의 《Life Together 공동체의 삶》은 핀켄발데 비밀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이루어진 공동체적 삶을 묘사한다. 그곳에서 참가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식사, 숙박, 레크리에이션, 정기적 예배를 나누며 함께 생활했다. 본회퍼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로 생활하며 실천할  영적 성숙을 실천할 때 가장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웨슬리 역시 이러한 방식에 있어서 챔피언이었다. 그가 설교를 마친 후에 “깨어”있게 되었거나 회개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은 상호 격려와 책임을 함께 나누어 지는 소규모 그룹으로 함께 모였다. 우리가 웨슬리안 신학을 기쁨으로 인정하는 동안, 아마 사실상 초기 감리교 운동을 성공으로 이끈 필수적인 것은 믿는 자들을 함께 모아 “사랑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게” 했던 웨슬리의 방법론이었을 것이다.[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복음 13:34의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면서, 또한 특히 초대 교회가 이 명령에 순종하여 살아간 것을 보면 이러한 방법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것이 된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하는 것과, 함께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에 헌신했다. 모든 신자들은 함께 있었으며,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성전에서 함께 모였다. 그들은 그들의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먹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주님은 구원받는 사람들을 그들에게 더하게 하셨다.

(사도행전 2:42, 44, 46-47)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희생이 요구될 수 있다.

본회퍼는 《제자도의 비용 The Cost of Disciplines》에서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분은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했다.[4] 우리 중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우리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우리는 누가복음 9:23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요한 웨슬리의 《언약 봉사》에도 비슷한 주제가 나온다.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
나를 당신의 뜻에 맞도록 놓으시고 당신의 뜻에 맞도록 내 위치를 정하소서.
나를 행동하도록 보내시고, 고난을 받도록 하소서.
나를 당신을 위해 고용되게 하시고, 당신을 위해 구별해 놓으시며,
당신을 위해 나를 높이시고, 당신을 위해 나를 낮추소서.
나를 채워 주시며, 나를 비워지게 하소서.
내가 모든 것을 갖게 하시고, 아무것도 갖지 않게 하소서.
나의 모든 것을 당신의 기쁨과
처분에 자유롭게 그리고 진심으로 맡깁니다.
이제 영광이시며 복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과 성령이시여,
당신은 나의 것이며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내가
땅에서 맺은 이 언약을 하늘에서 비준하여 주소서. 아멘.[5]

디트리히 본회퍼는 웨슬리안-성결 전통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그의 신학적 틀 안에서 철저히 루터교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증언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은혜는 우리가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동일한 은혜가 용서하며 또한 삶을 형성해 나간다.  동일한 은혜가 깨끗하게 하며 또한 능력을 준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환영하는 그 동일한 은혜는 우리가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르신다.

아마도 이것이 본회퍼의 목소리가 그의 죽음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계속해서 신자들에게 강력하게 울려 퍼지는 이유일 것이다. 편리, 안락, 타협으로 유혹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 그는 제자도가 값비싸며, 공동체는 필수적이며, 순종은 필요하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헌신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본회퍼의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긴 삶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를 넘어, 우리를 위해 처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며 이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도록 부르신 분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우리가 본회퍼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며, 그리스도가 인도하시는 곳 어디에서든지 담대하게 그를 따르게 되기를 바란다.

 

 

[1] 디트리히 본회퍼, 《The Cost of Disciplines》, R. H. Fuller, 번역. (Macmillan, 1959), 69.

[2] Robert W. Hull, 《Conversion and Discipleship: You Can’t Have One Without The Other Without The Other Without The Other (Zondervan, 2016)》.

[3] 요한 웨슬리,  《A Plain Account of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9:256.

[4]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99.

[5] The Covenant Service,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9 에서 (Grand Rapids: Baker), 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