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가치는 무엇일까?
1966년
어떤 체제는 인간의 생명을 평가할 때 유용성의 기준을 사용한다. 사람을 판단할 때 오로지 그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얼마나 유용할 것인지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인간을 비하하는 것이다. 그는 인류라는 거대한 덩어리의 일부에 불과하게 되며, 개인으로서의 개성과 자기 존중, 주도성, 포부, 그리고 운명에 대한 인식도 잃게 된다.
심지어 이 유용성 기준이 가시적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한 회심자는 그가 십일조와 헌금 또는 생산적인 봉사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그저 교적부에 적힌 또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전도와 영혼 구원에 있어 동기를 타락하게 한다. 그것은 교회의 성격을 저하시켜, 세상에서의 증인으로서의 효력을 떨어뜨린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영혼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하나님의 가치 척도에는 대도시 빈민가의 소외된 아이, 아시아의 굶주린 난민, 아프리카에서 악령에 고통받는 사람, 혹은 백만장자 간의 구분이 없다.
이 영혼에 대한 평가가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안데스 산맥의 미개척 부족에게, 적도의 아프리카의 숨 막히는 습기 속으로, 그리고 얼어붙은 북극지대로 보내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하나님, 즉 영원하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 가치는 경건한 제자들이 금식과 잠 못 이루는 밤 속에서 중보기도를 하게 하고, 더 희생적으로 드릴 수 있도록 절제된 삶을 살도록 강권한다.
아마도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날 것이다. 가정과 가족을 위해 지치지 않고 일하며, 건강과 안전을 세심하게 돌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가득한 채 아들을 베트남으로 떠나보내는 장면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한 목회자이자 아버지였던 분이 가족 이야기를 하며, 한 신문에서 찢겨진 한 장의 그림을 꺼내 보였다. 그 그림에는 군복을 입고 그들의 임무에 필요한 장비를 지닌 두 명의 군인이 철조망 뒤에 서 있는 모습이 있었다. 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베트남에 있는 미군 병사들이었다. 헌신적인 아버지는 "저건 내 아들, 테드 주니어야.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알아봤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절제되어 있었지만, 무거운 어깨와 진지한 얼굴, 그리고 촉촉한 눈에서 사랑이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을 보시는 방식이다. 그들이 미국 출신이든, 사이공에서 왔든, 하노이에서 왔든 말이다. 하나님은 아시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유럽인이든, 미국인이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신성한 사랑의 연민과 강권을 주소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영혼을 위해 전력을 다하도록 도우소서!